<송일훈 칼럼> 고류유술 유파인 관구류(関口流)의 역사적 흔적을 찾다(6)

조원익 기자 / 기사승인 : 2019-03-04 16: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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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류(関口流)는 관구류 신음류(関口新心流)라고도 부른다. 이를 창시한 사람은 에도초기(江戸初期)의 세끼꾸지하쯔로시신(関口弥六左衛門)이다.

 

 

 즉 《武芸小伝》에는 팔랑좌위문(八郎左衛門)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장남 팔랑좌위문씨업(八郎左衛門氏業)의 혼합한 것은 관구(関口)가계도에는 미륙좌위문(弥六左衛門)이다.


 세끼구찌류(關口流)의 유술은 기도류(起倒流) 함께 에도시대(江戶時代)의 가장 저명한 유파 중의 하나이다. 야와라로 불리우던 종래의 무예에 유(柔)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도 세끼구찌류(關口流)이며 이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서술된 《關口流柔誘引書》에는 다음과 같은 문헌이 보인다.


 “부드러움(柔)은 오직 부드러운 사물만을 ‘유(柔)’라 했다. 세끼구찌류의 부드러움(柔)은 그렇지 않다. 버드나무(楊柳)는 자극에 반항하지 않으며 바람(風)에 따라갔다가 본체로 돌아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버드나무처럼 상대의 힘을 역으로 순응하면서 본체를 유지하는 것으로 부드러움(柔)의 전신이다. 세끼구찌류와 같은 신신류(新心流) 유술의 기술체계는 다음과 같다.


 우선 초단의 경우는 수적(수속 8개, 기발의형 : 手續 8개, 機發の形)에서 시작하고, 네지아이(縿合) 6개조, 타이(捕) 4개조, 가타(固) 7개, 협지차포(脇指車捕) 16개조, 입합(入合) 6개조, 구미아이(組合) 10개조였다. 다음으로 중단에서는 입합대소(入合大小) 8개조, 포수입합(捕手入合) 4개조, 기타(固) 28개조, 소구족(小具足) 20개조 등이 있다.


 마지막 단계의 신체기법은 매우 심오하다. 우선 기본적인 ‘가타(形)’에 의한 사지오체(四肢五體)를 단련하고 몸으로 습득해야 한다. 활기활체(活氣活體)를 양성하여 실전에서 필요한 격투병법을 지도한다. 부드러운 마음(柔心)을 부드러움(柔)이라고 하고, “세끼구찌의 부드러움(柔)은 모든 제예(諸藝)의 근원이다. 넓게 무예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부드러움(柔)을 배워야한다”라는 말이 남아 있지만 몸을 다루는 체법과 기술, 기합, 해당 시기의 무예를 모아 사용하는 것이 유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면곡(綿谷)의 《日本武芸小伝》에는 미륙좌위문(弥六左衛門)이 올바른 것이라고 언급했다. 씨심(氏心)은 후에 유심(柔心)으로 일컬어 경장(慶長) 1598년에 태어났으며, 관문(寛文)의 10년 3월 7일 74세 나이에 병사했다. 그러나 그의 태생은 아직까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법호는 전성원유심일료(全性院柔心日了)이며 이에 관한 관구신심류(関口新心流)에는 개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新心流之序》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는 젊을 때부터 참(斬)의 기법을 배우는 의향(意向)이 있었기에 독학으로 수련했다. 그리고 유심(柔心)의 차남 만우위문씨영(万右衛門氏英)은 정향(貞享)의 1687년에 저술한 《関口新心流柔意趣》에도 유심(柔心)의 기술을 여러 곳을 배회해 가며 이러한 기법을 지도했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新心流之序》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나는 일찍이 도부(東武)(현재 이 지역은 도쿄(東京)와 사이타마(埼玉)현의 전역을 말한다)에 있었는데 그 때에 유(柔)라고 일컫는 사람이 있으니 유술(柔術)의 여러 유파를 견문했던 것은 사실이며 다만 지도하는 사범은 없었다. 거의 독력으로 궁리하여 창안했다. 처음 야마토코오리야마(大和郡山)의 혼다(本田) 가문에 있었다. 그 후에 기주뢰선(紀州頼宣)의 호위 무사였으며 번(藩) 지역의 총사범이 된다. 번(藩)은 에도(江戸)시대의 다이묘(大名)들이 지배한 영지, 인민, 통치 기구의 총칭이다.


 유심(柔心)의 자식에는 삼남 삼녀가 있었는데 장남은 팔랑좌위문씨업(八郎左衛門氏業), 차남은 만우위문씨영(万右衛門氏英), 삼남은 미태랑씨효(弥太郎氏暁)이고, 장녀는 의(義)이며 차녀는 가(家)이다. 이들 가문 남자들은 그의 부친과 비교해도 모든 기법에서 손색이 없었다.


 세끼꾸지류(関口流)의 번제(藩制)는 봉건 시대의 지방에 번(藩)을 두어 나라를 다스리는 제도이다. 이 시대에는 기도류(起倒流)와 요신류(楊心流)가 가장 번영했다. 또한 대대로 이어 내려온 한 가문의 가계(家系) 계통의 청화원씨(清和源氏)로 계명하기 위하여 장남부터 차녀의 이름들을 팔만태랑의가(八万太郎義家)로 했다. 세끼꾸지류(関口流)에는 다른 초기의 유파와 같이 유술(柔術)뿐만이 아니라, 유거합(柔居合)의 전장에서 다양한 병법 이치의 마음가짐 까지 포함되어 있다. 1843년 원덕수(源徳修)가 집필한 《撃剣叢談》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심류(新心流)에는 거합(居合), 태도(太刀), 유(柔)의 세 개에 의거해 이를 포수(捕手)라고 말하며 이에 대한 마음가짐을 조목조목 적어두어 사람들에게 전래되고 있다. 세끼꾸지류(関口流)로부터 나온 유파로서는 삽천류(渋川流)가 가장 유명하다. 씨심(氏心)의 장남 팔랑좌위문씨업(八郎左衛門氏業)은 후년 로백(魯伯)라고 일컬었다. 승응(承応) 1654년 기주번(紀州藩)을 물러나 여러 나라를 수행한 후 에도(江戸)의 지빈송정(芝浜松町)에 도장을 열었다. 또 연보원년(延宝元年) 1673년에 다시 번(藩)에 돌아와 300石을 받았다. 그러나 원록(元禄) 11702년에 은거하다. 정덕(正徳)의 1716년 4월 22일 87세 나이에 사망했다.


 차남 만우위문씨영(万右衛門氏英)는 노성(了性)이라고 하는데, 그 기술은 부형(父兄)을 넘었다고 세상에 알려져 노성(了聖)이라 불렸다. 그는 출사하여 임금 75량(両)을 받았다. 이 임금은 에도(江戸)시대의 금화 단위를 말한다. 그의 사망시기와 연령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하였다. 또한 삼남 미태랑씨효(弥太郎氏暁)는 후년 의루(蟻楼)라고 일컬었다. 20석(石) 세 명의 관료로부터 점차 승급되었으며 20석(石)이 주어졌다. 향보(享保) 1729년 10월 12일 90세 나이에 사망했다. 현재의 강도관 유도에 있어 수련에 들어가기 전에 배우는 “낙법”은 세끼구찌하쯔로시신(關口八郞氏心)이 창시했다. 그는 야와라의 묘리를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유술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았으며 시조는 아니지만 유술계의 방향을 근대화로 이끄는 데에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이학래(1990), 한국유도발달사, 보경문화사).


 시부카와류(渋川流)는 세끼꾸지신음류(関口新心流)의 2대 하치로우에몬씨업(八郎右衛門氏業)의 제자 시부카와 반고로(渋川伴五郎義方)에 의한 것이다. 그의 태생은 다이와(大和)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정확한 정설이 없다. 《南紀徳川史》의 굴내신(堀内信)편 세끼꾸지류(関口流)의 역대를 기록한 문헌에는 의방(義方)의 유심(柔心)에게 배운 것처럼 서술 되었으나 기주(紀州)의 유술(柔術)을 언급한 서적《紀藩柔咄集》과 《本朝武芸小伝》 등에는 씨업(氏業)에게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부카와류(渋川流)는 초대 의방(義方), 2대 윤친(胤親), 3대 자구(資矩), 증손시영(曾孫時英)들에 의해 이론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상무관유술(尚武館柔術)의 연혁(沿革)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유술(柔術)의 가르침은 관영(寛永)의 옛날 관구유심(関口柔心)이 연구 확장해 내제자, 즉 삽천반오랑의방(渋川伴五郎義方)에 이르러 반윤친(反胤親) 같이 모든 힘을 기울이었다. 정통 일가를 이루어 무의당(武義堂) 도장을 설립하여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 세상에 삽천류유술(渋川流柔術)이라 명명했다. 그의 손자 자구(資矩)가 더욱 이러한 이치를 깨우쳐 증손자 시영(時英)에 이르러 뛰어난 기법을 모아 재정립했으며 이를 기세법이라 정하고 기록했다.


《日本武芸小伝》에 의하면 의방(義方)이 시부카와류(関口流) 전수를 받은 것은 보영(宝永)의 1711년 5월이며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그는 즉시 화가산(和歌山) 성벽 아래에 도응관(道凝館) 도장을 개관했다. 또 천화(天和)의 1681~1684년 초에 에도에 가문 지(芝)의 구보성산(西久保城山) 지역에 무의당(武義堂) 도장을 다시 개관했다. 이 지역은 현재로 말하면 동경항구(東京港区)를 의미하며 노중(老中) 자리에도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장군 직속으로 정무일반인 총리이며 아부풍후수(阿部豊後守), 토옥상모수(土屋相模守), 토좌번수산내후(土佐藩守山内侯)의 비호를 받았으며 그의 세력을 확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연재한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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