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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이지만, 요즘 인플루언서라고 해서 사회관계망에서 타인의 주목을 끄는 일들에 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리 오래 갈만한 전문가적인 직업 분야는 못 된다고 본다. 자기감정의 소진이 너무 커서 쉽게 지칠 분야이다. 한참을 지나고 나면 IT기술이 낳은 일시적인 정보 플랫폼의 컨텐츠노점이나 정보행상 같을게다. 공연히 플랫폼 프로그램과 엔진개발업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일이다. 이미 미국의 몇몇 빅 테크 플랫폼 기업과 정보기술 기업의 시가총액 합은 2023년 10월 현재 우리 돈으로 2경 원에 육박한다. 일본, 독일, 영국, 우리나라 4개국 시가총액의 총합보다도 크다.
과문한 입장에서 노후정보 SNS들의 일부 내용만 촌탁(guess)해보면, 노후를 잘 대비하려면 몇 가지는 꼭 준비해두라거나, 몇 가지는 절대 하지 말라거나 하는 등등의 단호한 주장들이 많다. 아무래도 남의 이목을 끌어 말품의 보상을 받으려 하니 그런 자극적이고 단순한 말들을 하나 보다.
돈은 절대적인 가치도 아니고, 돈은 규격화하여 다루어지지도 않는 개인 지성적 존재이다. 사람마다 건강의 조건이 다르고 사랑의 방식이 다르듯이, 돈도 사람마다 그 존재감이 다르고 가치관도 개별적이다. 그래서 함부로 일반화하거나 정량화하면 안 된다. 금융회사들이 노후 상품을 보장한다고 이런저런 마케팅으로 고객들의 푼돈을 평생 받아 가서, 우선 자기들이 먼저 먹고 살아온 것을 삼척동자도 이젠 다 안다. 그래도 아직 그런 일은 멈추지 않는다. 그건 그 분야의 종사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필자도 그런 일에 상당기간 종사한 적이 있다.
유약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래도 혼자 다루고 보관하고 살피는 것 중에는 돈이 그나마 자기 역량의 범주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의 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재화라는 의미의 세칭이다. 생명, 사랑, 안전, 가족, 사회관계, 자연현상 등 그 외의 모든 것은 내가 잘 간수 한다고 간수되는 게 아니다.
내 돈의 문제를 남에게 맡기거나 사회적 관리로 제도화하면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에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느닷없이 화폐개혁을 하기도 하고, 통화량과 금리를 정부에서 좌지우지하고, 외환이나 증권도 전쟁이나 사변이나 재해가 나면 삽시간에 휴지가 된다.
재화인 돈을 잘 보관하고, 오래가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찾아서 잘 간수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그래서 아직도 변함이 없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지금도 가지고 있는 금(gold)이 그런 역할을 오래 해 왔고, 요즘은 미국 달러가 그런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이 또한 먼 미래에는 모르는 일이다. 비트코인 개발자(사토시)도 미국 달러를 누군가들이 제멋대로 관리한다고 해서 개발했노라고 했다.
경영학에서 다루는 전략경영이란 개념이 이런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수한 환경의 변화를 전제로 하고, 나의 고유한 입장을 기반으로 하여, 장차 돈을 어떻게 다루고, 벌고, 모으고, 관리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분야가 재무전략 경영이다.
만일 2030의 MZ세대라면 이런 접근으로 경제적 인생 대응을 시작해 보길 권한다. 현재 그들 앞에 놓인 경제사회의 제도적 노후 준비환경은 어느 것 하나 장기적인 전망을 할 수가 없다. 특히 2030은 100세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과거 수명으로 보면 초장기 인생을 살 수도 있는 새 생명 환경의 세대들이다.
이미 공공의 미래 약속부터 흔들리고 있다. 연금이 일대 개혁을 앞두고 있으며, 점점 국가의 복지지원도 아주 부정기적으로 변하고 있다. 세상의 이치는 일시에 주는 돈이 많아지면 미래의 정기적인 지급은 줄어든다. 프랑스는 일시에 평생 받을 사회보장성 지원금을 청년들에게 지금 주자고 하는 학자들의 논의도 있으니, 미래경제의 공동체적 준비는 점점 만기의 약속이 없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인생은 수명이라는 각자의 개별적 만기가 있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사람들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간다. 본질을 보자면 미래나 노후는 언제나 엄연한 개인의 삶이고 개별적인 대응의 문제이다. 다만 가족이란 혈연에서의 관계 형성이나 일생의 대응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 그 중심에는 사랑과 결혼과 출산이나 죽음이 있다. 생명의 순환은 원래 이렇게 혈연적이고 개별적이다.
사회화한 삶의 형식은 전쟁, 재해, 질병, 기근 등의 문제가 닥치면서 국가경제, 산업화, 근로제도 등의 틀로 들어간 노동자, 농민, 또는 서민들의 문제를 다루려는 인문사회적 지성으로 발달하여 특히 15세기 이후에 동서 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개인 경제환경에서 정치적 역할도 그래서 커졌고, 이제는 아예 정치가 유권자의 경제적 수단의 출구가 되려는 양상도 본다. 하지만 미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지주와 농민의 관계가 사라지듯이, 초지능형 산업혁명의 기세로 보면 노사관계도 이젠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지주나 사용자가 아니라 정부가 중간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생존 문제를 다른 사회소득과 지출 부문과 조율하며 꾸려갈 것이 보인다.
미국이 지금 2022년 중반부터 엄청난 고금리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이건 균형금리도 아니고 시장금리는 더욱 아니다. 그냥 다른 정책 목표를 위해 정하고 가는 것이다. 이 상황은 장기예금자나 장기대출자에게는 전혀 대응이 안 되는 일이다. 환율도 그에 따라 제멋대로이고 돈의 가치는 춤을 춘다. 외부경제의 여건은 계획이나 절차가 갈수록 통하지 않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게다가 전쟁이 빈발하기 시작했다. 한 자리에서 몇백 명, 삽시간에 몇천 명이 사망하는데도 세상은 어느새 익숙하다.
이러고 보니 미국의 금융회사 경영자들이 경제가 더 어려울 것이니, 현금으로 예금을 맡기고, 채권을 사라는 소리를 마치 복음처럼 하고 다닌다. 그들은 경제가 좋든 나쁘든 언제나 고객의 돈을 더 맡는 일을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금이 들어오면 그 돈으로 잘 알고 오래 믿어온 고객에게만 돈을 더 비싸게 빌려두고, 주식이나 부동산이 내려가면 자기들이 먼저 자기자산으로 사서 돈을 더 벌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가족 상황은 그게 아니다. 어떤 상황이 생겨도 언제나 식구들의 삶이 나아지고 넉넉하고 앞으로의 걱정이 줄어야 한다. 재난과 피난을 정치인이나 공직자나 금융인이 동반해 주지 않는다. 그들도 결국은 자기 가족 곁으로 간다.
어떤 사람은 ‘나는 혼자 이렇게 산다’하면서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정하고 사는데, 그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자녀나 부부가 다 생각이 같을 수 없다. 그러면 그 가정의 삶은 행복하지도 못하고 만족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가정은 가족 모두가 가정마다의 재무 지성과 현실 인식이 잘 공감되고 늘 공론화되어야 한다.
이미 40%가 80대까지의 생존확률을 보이고 있으며, 90대까지의 생존확률도 점점 10%에 가까워진다. 100세 돌파 인구도 어느새 1만 명을 헤아린다.
국가나 사회가 결단코 개인의 삶과 죽음을 다 간여하고 도울 수는 없다. 이전에 없던 의료보험이 생겨서 의료 선진국이 다 된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들에게 조용히 연명치료 거부의 신청도 받는 게 현실이다. 한 노인의 삶과 죽음은 원래부터 그가 속한 가족과 본인의 사안이다. 우리나라의 노후용 사회적 장치는 아직 한 사람의 생애도 못 되는 50년도 채 안 된 일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노후 사회적 장치 존속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갑자기 코로나와 전쟁과 자연재해가 유난히 쉬지 않는, 대 혼돈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삶과 죽음의 엄연함과 절실함과 숙명을 가족들이 온전히 공감하고 지혜롭게 근검하면서 일상을 진실하게 동행하는 가족경제 공동체 의식이 다시 살아나야 할 때이다. 팬데믹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중동과 흑해와 지중해의 안타까운 전쟁과 재해와 재난이 역사의 반복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저 슬픈 목숨을 어찌하면 좋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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