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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신각라부의는 누구인가?
청나라 말로는 아이신기오로 푸이라고 부르는 그는 청 태조 누루하치의 후손으로 그 성씨가 애신각라(愛新覚羅)다. 신라를 생각하고 신라를 사랑한다는 의미다. 비록 만주족임을 자청한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늘 우리민족을 자신들과 동일한 민족 선상에서 보았다.
'만주원류고'에 의하면 '금사·세기'에 전하기를 “태조가 요나라 군사를 변경에서 격파하고, 양복 오달라로 하여금 발해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불러서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청나라는 우리민족을 같은 민족의 선상에서 보았던 것이다.
일본은 이 점을 십분 이용하려고 했다.
첫째로 국민당에 합류한 장쉐린을 만주국의 국통으로 세우는 것은 아무래도 명분이 약하다. 하지만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라면 충분히 그 명분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만주가 원래 청나라의 발상지이며 청나라가 대륙에 있던 한족의 명나라를 침략해서 지배했던 것이니, 중화민국의 독립으로 명나라의 땅을 찾은 중국에 대항하여 청나라를 재건한 것이 만주국이라는 명분을 만들면 된다는 계산이었다.
두 번째는 자신들이 이미 합병하고 있는 대한제국과 청나라의 선조들이 같은 혈통이라는 점이다. 비록 만주국 건국당시에는 같은 민족임을 천명하지는 않고 있지만 역사상으로는 분명히 같은 혈통임으로 대한제국을 병탕하고 있는 자신들이 만주국을 건국하게 한 후, 국제사회의 눈을 피해 괴뢰국가로 운영하다가 적당한 때를 보아서 병탄하는 것 역시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의 국제정세는 시시각각 변동하는지라 언제든지 제3국과의 동맹과 전쟁이 가능했던 시기라는 것을 일본은 계산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만주국을 건국하려는 일본의 목적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를 자신들이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둘을 하나로 묶어서 지배하다가는 혹시 그 저항에 부딪히게 되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니 분리해서 지배하자는 속셈이었다. 그리고 만주국이 청나라의 후손들이라는 점에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는데 만주국을 그 앞잡이로 삼으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속셈 역시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일본의 헛된 망상은 그 결실을 보게 된다. 1932년 3월 9일 애신각라부의가 국왕에 취임하고, 대동이라는 연호를 쓰는 새로운 국가인 만주국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그릇된 계산에서 출발한 야욕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망과 함께 연합국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는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련군은 뒤늦게 8월 8일이 되어서야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8월 9일 0시를 기해 만주국을 침공하는 만주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 관동군과 소련군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당시, 소련군은 이미 만주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만주국은 8월 17일 총리대신 장징휘의 주재로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를 결정한다.
그리고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 야마타 오토조 대장이 무조건 항복하기 하루 전날인 8월 18일 만주국의 황제 푸이가 퇴위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멸망하였다. 푸이는 8월 19일 선양에서 비행기로 일본에 망명하려다가 소련군에 사로잡혔다. 원래는 관동군이 항복하고 그 다음 날인 8월 20일 퇴위조서를 공포할 예정이었지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만주국은 푸이가 퇴위한 1945년 8월 19일 해체되고 만다.
이후 소련은 8월 30일까지 만주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있던 일본 관동군에 대한 전면 무장 해제를 하였으면 11월에 만주를 중화민국에 반환하였다. 그때부터는 중화민국이 만주를 통치하다가 1949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산당의 중국 통일 이후부터는 만주국의 영토인 만주를 중화인민공화국이 통치하고 있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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