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장보고(신라명신)는 중국의 고서 <新唐書>에는 궁복(弓福)을 보고(保皐)라고 했다. 그의 동생 정년(鄭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의협심이 강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續日本後紀》에 이르러서는 그를 장보고(張寶高)라고 적고, 그가 중국.일본과의 사이에서 자립해 무역을 한 중대한 무장(武將)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그는 남으로 양자강 하류에서 북으로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이르기까지를 그 통상교통의 세력범위로 하여 많은 부와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장보고(張寶高)는 바로 그의 이름 보고(保皐)이다. 그것은 그 당대의 기록인 《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에서도 이를 첫째로 증명되고 있다. 《續日本後紀》는 또한 그 당대의 사료를 취하여 기술한 바와 같이 동등한 증거라 생각된다. 특히 《三國史記》에는 궁복(弓福)의 성을 장씨(張氏)로 하고, 《新唐書》에 의하여 일명 보고(保皐)라고 주(註)하고 있다. 이 주는 틀림없는 사실이나, 궁복(弓福)을 이름으로 하여 성을 장(張)으로 한 것은 《新唐書》의 기사를 섞어 취한데서 생긴 오류이라 생각된다(今西龍(1927).
『慈覺大師入唐求法巡禮行記みて』,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京城帝國大學). 이를 생각건대 궁복(弓福)은 그의 이름으로, 신라(新羅)의 상인(商人)과 무장(武將)으로서 입신했기 때문에 성이 없었으므로, 궁(弓)을 변으로 하여 장(張)이라 하여 이것을 성으로 취하고 복자의 근사음의 두자를 나누어 보고(寶高) 또는 보고(保皐)로 하여 이것을 이름으로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궁복(弓福)으로 불린 일은 있었지만, 장궁복(張弓福)으로 일컬이었던 일은 여러 사료가 없었다. 《三國史記》에서 ”청해진대사궁복성장(淸海鎭大使弓福姓張)“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청해진대사궁복(淸海鎭大使弓福)”이라 쓰지 않은 것은 신라전(新羅傳)에 의해 “청해진대사궁복(淸海鎭大使弓福)“이라 기록이 있고, 《新唐書》에 의하여 “성장(姓張)”이라고 했다. 일명(一名) 보고(保皐)라고 주(註)한 것이라 의심하지 않다. 또 《三國遺事》에서 “궁파(弓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복(福)”의 미음을 생략한 것이 “파(巴)”의 음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장보고는 《三國史記》에 출생 및 부조도 모른다고 전해지는 사료에 바와 같이 일개 천민으로서 입신출세한 인물로 그의 이름도 한중일에서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는 궁복(弓福) 궁파(弓巴)이라 하며 고대 중국에서는 장보고(張保皐)이며 고대 일본에서는 장보고(張寶高)라 한다. 이유를 보더라도 그의 이름이 전해져 일정치가 않다. 이것은 원래 궁복(弓福)이란 이름이었던 것을 궁복(弓福)의 궁(弓)을 변으로 하여 장(張)이란 성으로 취하고, 복(福)자를 그 음에 가까운 보고(保皐) 또는 보고(寶高)의 두 자로 나누어 있으므로, 이를 삼은 것으로 가정(假定)해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일본 고서의 《入唐求法巡禮行記》와 《續日本後紀》등에서 장보고(張寶高)로 이를 서술하고 있다.
서기 840년 신라 청해진(淸海鎭)의 대사(大使)이던 장보고의 고서는 《三國遺事》와 《新唐書》열전(列傳) 그리고 고대 일본 사적인 《續日本後紀》에도 보인다. 신라의 《三國史記》에서는 장궁복(張弓福)이란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 고서를 통해 장보고의 생애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장보고기념사업회 《張保皐關係硏究論文選集》).
장보고 그는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된다. 보고(保皐)와 정년(鄭年)은 무예가 뛰어나 말을 타고 창을 던지면 신라와 서주에 있어서는 그의 상대가 될 사람이 없었다. 특히 기마와 창술, 궁술에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新唐書》의 신라전(新羅傳)에는 아래와 같이 보인다.
“신라 장보고와 정년(鄭年)은 모두 격투술(투전 : 鬪戰)을 잘하고, 창 쓰는 법에 익숙하여 상대할 사람이 없더라(《新唐書》, 卷二百二十 列傳第一百四十五, 有張保皐鄭年者皆善鬪戰工用槍年不復能沒海履其地五十里不噎角其勇健保皐不及也年以兄呼保皐保皐以齒年以藝常不相下自其國皆來爲武寧軍小將)”라고 했다.
특히 두목(杜牧), 《樊川文集》 권(卷)6, 장보고(張保皐).정년전(鄭年傳)에는, 신라(新羅)사람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로부터 당의 서주(徐州)에 와서 군중소장(軍中少將)이 된다. 보고는 30세며, 정년은 그보다 10세 연하였다. 두 사람은 격투술(싸움)을 잘하여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면 그들의 본국에서는 물론 서주에서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 …… (중략) …… 뒤에 보고는 신라로 돌아와서 국왕을 배알하고, “중국 도처에 신라인이 잡혀 와서 노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청해진을 설치한다면 해적들이 사람들을 잡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자 국왕은 그에게 1만 인을 주어 그의 청대로 했다. 그 이후 태화(太和) 년 간 부터는 신라인을 잡아가는 해적들이 없어졌다.
그러나 보고가 신라에서 청해진 대사가 되어 있을 무렵, 정년은 실직하여 당나라 사주의 연수현(漣水縣)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고 있었다. 어느 날 정년은 연수를 지키는 장수인 풍원규(馮元規)를 찾아가서 의논하기를 “신라로 돌아가 장보고 아래에 몸을 맡기겠다”고 했다. 원규는 “자네와 보고는 서로 원한을 품고 있는 사이인데 어찌 그에게 몸을 맡기려 하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정년은 “기한으로 죽는 것보다 싸워 죽은 편이 나았다고 말했으며 하물며 그것도 고향에서 죽으니 바랄 것이 없노라”고 했다. 그리하여 신라로 돌아가서 보고를 만났다. 보고는 그를 극진히 대접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연회가 끝나기 전 국사(國使)가 찾아와서 왕위찬탈의 소식을 전했다.
보고는 5000의 군사를 정년에게 나누어주고 그의 손을 잡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어찌 이 환란을 평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정년은 신라로 가서 반란자를 진압하고 국왕을 옹립했다. 국왕은 보고를 재상으로 삼고 정년을 그의 직에 대신하게 했다(杜牧, 《樊川文集》 卷6, 張保皐.鄭年傳, 新羅人張保皐鄭年者 自其國來徐州爲軍中小將 保皐年三十年少十歲兄呼保皐俱善鬪戰騎而揮槍其本國與徐州無有能敵者 …… (中略) …… 後保皐歸新羅 謁其王曰 遍中國以新羅人爲奴婢 願得鎭淸海(新羅海路之要) 使賊不敢掠人西去 其王與萬人如其請 自大和後海上無鬻新羅人者 保皐旣貴 年去職飢寒 在泗之漣氷(氷當作水)縣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乞食於張保皐 元規曰 若與保皐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飢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保皐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皐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誅叛者立王 王召保皐爲相 以年代守淸海).
위의 고서를 보더라도 장보고(張保皐)가 실전격투무예에 능했다. 고대 중국의 당시대의 격투술 편의 《舊唐書》와 《新唐書》에서 각저(角抵), 수박(手搏)을 같은 의미로 해석했다. 특히 “소인원(小儿園)”이라는 곳에서 각저(角抵)나, 상박(相搏.相撲)과 같은 잡희를 할 인재를 양성하는 반자(班子 : 劇團)가 있었는데, 그중에는 “상박봉(相撲朋)”이라는 솔교(摔跤) 전문 인재들이 있었다. 《角力記》에서는 “사(社)”라고 일컬은 민간 솔교(摔跤)의 전문단체가 있었다. 그리고 당대에는 솔교(摔跤)만을 전문 직업으로 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곳에서 장보고(張保皐)가 무사수행을 하였을 것이다. 이를 통해 장보고(張保皐)는 무령군소장(武寧君少將)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장보고의 재당 시절 장보고와 접한 적이 있는 당의 저명한 시인 두목(杜牧)(803~852)이 그의 문집 《樊川文集》에서 장보고(張保皐)의 인간적 면모를 평가해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충만한 사람으로 기술하였던 것이 《樊川文集》 권(卷)6 장보고(張保皐) 정년전(鄭年傳)에 보인다. 장보고 그는 ‘나라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어(語)의 잠언을 인용하면서 장보고(張保皐)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두목(杜牧)의 장보고에 대한 이 평가는 이후 역사 고서에 그대로 전승된다. 예를 들어 송대(宋代) 11세기 중엽 경에 편찬된 《新唐書》에서 송기(宋祁)는 장보고에 대한 두목의 평가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장보고에 대한 자신의 논찬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아아 원한이 있어도 서로 봉공함을 저해하지 않고, 국가의 근심을 앞세운 이로는 진나라 때 기해가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장보고와 곽분양(郭汾陽)이 있었으니, 누가 이국(夷國)에 사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라고 언급한 내용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다음 칼럼 편에서 계속 연재한다.
송일훈 박사(동아시아 무예전쟁사·문화교류정책 평론가)
전) 서울대학교 스포츠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연구교수
현) 용인대학교 무도연구소 전임연구원
[저작권자ⓒ 세계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