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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의 ‘E·N·D 이니셔티브’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체제 병행 추진’에 비견될 만한 포괄적 평화 구상이자 비핵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북한을 향한 적극적 대화 제안으로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날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대한민국은‘E·N·D 이니셔티브’로 한반도 냉전을 끝내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E·N·D’, 즉 교류(E)와 관계 정상화(N), 비핵화(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대북 대화를 통해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하고 평화 공존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인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비핵화(D)와 관련해선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인식 아래 현실적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며 중단 → 축소 → 폐기의 3단계 비핵화 해법을 거듭 제시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선 한국이 주역이 아닌 조역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페이스메이커’론, 북한이 노리는 핵보유국 간 군축 협상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3단계 비핵화’론에 이어 교류와 관계 정상화를 앞세운 한반도 평화 구상으로 세 번째 ‘대북 유인책(교류 → 관계 정상화 → 비핵화)’을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개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이것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중단(동결)·축소·폐기(비핵화)의 3단계 접근법은 어떤 관계인지 등이 불명확해 실효성 있는 대북 접근법으로 삼기엔 아직은 모호해 보인다. 특히, 북한이 거부하는 남북 교류를 시작하기 위한 ‘창의적 접근법’ 마련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할 것 같다. 특히 이러한 모호함 때문에 ‘E·N·D 이니셔티브’는 핵심 과제이자 최종 목표인 비핵화가 교류나 관계 정상화보다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관계 정상화를 내세운 것은 동족과 통일을 부정하는 북한의 ‘두 국가론’을 인정하는 것은 아닌지 논란을 부른 것도 사실이다. 북한은 2023년 말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했다. 지난해에는 러시아와 군사동맹 조약을 맺고 핵·미사일 증강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이런 격랑의 와중에 확실한 검증 없이 핵 중단 선언만으로 제재가 완화되면 북한에 경제 지원이라는 반사적 과실만 안겨주고 우리는 영원히 ‘핵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재앙적 상황이 초래될 우려도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일단 이 원칙들은 “과거 남북 합의와 2018년 북-미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도 강조된 것”으로 “포괄적 접근법을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과 세계 평화·번영에 기여하겠다.”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E·N·D의 세 요소 각각은 하나의 과정으로, 서로 간 우선순위와 상호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라며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를 통해” 세 요소가 “서로 상호 추동하는 구조로 추진해 가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두 국가론을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지만 당장 정부 내에서도 “남북한은 오랫동안 사실상의 두 국가”라며 남북 관계를 ‘평화적 두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어 엇박자가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라는 대북 제안을 두고 정부는 냉정한 현실 진단에 기반한 실용주의적 접근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유연하고 과감하다. 거기에 깔린 우리 역할에 대한 한계론이나 당장 눈앞의 대화 진전을 위한 현실론이 북한에 대한 일방적 양보나 북-미 직거래 용인으로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교류·관계 정상화·비핵화가 별도로 또는 동시에 추진될 수 있으며 서로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선순환 구조가 될 수도 있다. 관계 정상화는 남북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북한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9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이 없다.”라고 말했고, “비핵화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라면서도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을 흘리며 이중 전략을 구사하는 마당이다. 따라서 발 빠른 대북 구상 발표도 긴요하지만 보다 더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과 로드맵을 토대로 한-미 간 정책 조율에도 신경을 써야만 할 것이다.
남북 관계 개선과 북핵 문제 해결이라는 난제를 풀려면 현실적·합리적·다면적 접근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재명 대통령의 고심은 충분히 이해된다. 북도 정부의 새로운 접근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좀 더 내용을 다듬고 보다 구체화하는 바람이 있다. 또한 북한이 지금 남한이 제안하는 그 무엇에도 호응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이 북한에 꾸준히 관계 회복을 바라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국제사회와의 관계 정상화를 바란다는 것 또한 북·미 회담을 원하는 북한에는 나쁘지 않은 메시지다. 북한이 지금은 전략적 차원에서 거칠게 반응하고 있지만 남한의 진정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쌓이다 보면 결국 태도가 바뀔 개연성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대북 정책은 국민과 함께 가야만 추동력이 생긴다.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는 변함없는 궁극적 목표이고 통일을 지향하는 「대한민국헌법」 정신을 당연히 견지(堅持)하고 있지만, 국민 및 야당과의 소통도 강화해 오해의 빌미를 원천 차단해 주길 바란다.
북한이 비핵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상황에서 ‘E·N·D 이니셔티브’는 현실적인 접근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실용주의적 접근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게 되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특히 ‘관계 정상화’는 외교적으로 국가 간 원만한 수교를 의미하는 만큼 거듭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북한의 ‘두 국가론’을 따라가는 모양새가 돼선 절대로 안 된다. 북한과 미국이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국 패싱’이 현실화하면 북의 비핵화는 더 요원(遙遠)해질 우려도 적잖다. ‘E·N·D 이니셔티브’의 성공을 위해서도 먼저 북의 ‘비핵화 원칙’을 분명하게 못을 박은 뒤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한 치밀하고 구체적인 로드맵을 함께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북한도 “한국과 마주 앉을 일은 없다.”라고 고집만 부릴 게 아니라 전향적(轉向的) 자세로 나오기를 바란다. 남북 신뢰 회복을 위한 담대한 이재명 대통령의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라는 제안마저 계속 거부하는 건 그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위(當爲)도 명분(名分)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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