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역사편찬원,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서울과 역사》 제104호 발간
- 조선시대부터 근대 서울 역사를 다룬 연구 총 6편 수록
-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에서 열람 또는 시민청 서울책방에서 구매 가능

[세계로컬핫뉴스] 서울역사편찬원, 등재학술지《서울과 역사》제104호 발간

이장성 기자 | news@thesegye.com | 입력 2020-03-27 1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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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세계타임즈 이장성 기자] 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은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서울과 역사≫ 제104호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과 역사≫ 제104호에는 조선시대부터 근대 서울의 역사를 다룬 총 6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서울과 역사》제104호에 게재된 논문은 <15세기 한성(漢城)의 사신(使臣) 객관(客館)>(장지연 대전대 교수), <15세기 한양도성의 풍속과 문화지도 –성현의 『용재총화』를 중심으로->(김연수 한중연 박사수료), <영조대 종묘 외대문 내외 공간의 행례>(안소정 고려대박물관 학예연구사), <서울 봉원사 칠성각 「치성광여래도」도상연구-새로운 치성광여래 도상의 창출>(정진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일본군의 한성 점령과 군대해산-주차부대(駐箚部隊)의 개편과 공간 점탈(占奪)을 중심으로>(황선익 국민대 교수), <일제하 여의도비행장의 조성과 항공사업의 양상>(염복규 서울시립대 교수)이다.

 

 조선시대부터 근대까지 서울의 역사·문화를 다룬 총 6편의 연구 가운데, 황선익 교수와 염복규 교수의 논문을 주목해 볼 수 있다.
    
황선익(국민대 교수)은 <일본군의 한성 점령과 군대해산-주차부대(駐箚部隊)의 개편과 공간 점탈(占奪)을 중심으로>를 통해, 1907년을 전후하여 한성에 주둔한 일본군의 주둔 양상과 의미를 규명했다.

 

 황교수는 일본군 주둔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를 조사하던 중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작성된 「韓國京城全圖」와 관련 자료를 수집하였다. 본 논문은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민간, 군용지도에서 나타나는 일본군 주둔실태와 편제 변화 등을 추적한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경복궁과 경운궁 사이에 ‘선국주차수비대(鮮國駐箚守備隊)’를 주둔시키고, 용산에 대규모의 ‘영구병영’을 구축하여 러일전쟁 전후로 체계화된 주둔군 체제를 구축해갔다.

 

▲ [황선익 교수 제공] 1907년 81월 1일 한양도성 내 일본군 배치도(일본군 13사단 사령부 작성)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앞둔 7월 일본군의 동향은 활발해졌는데, 한성 내 각지에 있는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병력을 증가하고, 주요 거점을 확보했다. 종로 일대와 남대문-경운궁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남산에 있는 사령부가 군대해산을 최종적으로 지시했다. 이처럼 군대 해산에 투입된 일본군의 배치 현황과 시위대의 고립무원은 일본군 주차사령부에서 작성한 지도를 통해 극명하게 확인된다.

 

 군대 해산과 한성에 대한 무력 점령은 주차군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전개되었지만, 사실상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 및 황제 양위를 밀어붙이면서 일본 황태자의 한성방문을 추진했다.

 

[황선익 교수 제공] 190710월 일본 황태자 행차에 따른 병력배치도(일본군 13사단 사령부 작성 지도에 부기)

[염복규 교수 제공] 1933년 활주로를 정비한 여의도비행장

   

 

 일본 황태자의 한성방문으로 일본군의 병력은 더욱 증가되고, 기병 연대로 무장된 추가 병력은 이후 의병 탄압에 투입되었다. 즉 시위대 해산과 일본 황태자의 방한, 일본군의 증간과 의병에 대한 탄압은 일련의 연속선상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염복규(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일제하 여의도비행장의 조성과 항공사업의 양상>을 통해, 20세기 초 비행장이 있었던 여의도의 역사와 당시 항공사업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1916년 당시 여의도는 도심부와 가까우면서도 고립된 섬이었다. 이러한 입지조건을 고려하여 이곳에 간이비행장이 개설되었다. 1927년 「항공법」을 시행하면서 정식 비행장으로 정비되고, 이후 항공로 확장과 더불어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활주로를 축조하여 야간 조명탑을 설치하게 된다.

 

 그런데 여의도비행장은 개장 초기부터 비행장으로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홍수때 상습적인 침수지역이었으며, 활주로 길이도 짧아 항공기술의 발달과 비행기의 대형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후반 새롭게 김포비행장이 조성되었지만, 광복후 김포비행장을 미군이 사용함에 따라 여의도비행장은 상당한 기간 유지되었다.

 

 여의도비행장의 민간 공항 기능은 1961년에야 김포비행장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신시가지 개발을 시작하면서 1970년 공군 여의도기지도 성남으로 이전했다. 이에 반세기의 여의도비행장 시대는 비로소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일제하 여의도비행장의 일차적인 기능은 일본-조선-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항공로의 ‘중간기항지’였다. 식민지수도의 항공 포스트로서 ‘제국 일본 항공의 십자로(十字路)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의도비행장의 역사는 여의도라는 실재하는 공간을 넘어서 근현대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 그리고 20세기 한국사가 통과했던 식민지근대의 굴곡을 보여준다. 
 
이 책은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1층 ‘서울책방’에서 구매(10,000원)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tory.seoul.go.kr)에서 개별 논문을 다운로드 받거나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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